호모 파베르의 미래 #1/4
seezak
(p.388)
오늘 포스트휴먼을 논하는 우리의 기술사회는 목적지조차 불분명한 표류 상태에 있다.
그런데 기술을 통해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목적을 명확히 정한다 하더라도
망망대해에 떠 있는 콜럼버스의 배와 비슷한 처지일 뿐이다.
새로운 기술이 매일 등장하지만 그것들이 합치고 융합하여 어느 방향으로 우리를 몰고 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되돌아가도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으니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목적지가 있으나 가본 적이 없어서 희망을 버릴 수도 없고 성공을 장담할 수도 없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목적지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확실할 수 없으나 최선을 다해 나의 자리를 물을 수 밖에 없다.
의자할 것이라고는 고향에서 가져온 나침반과 상상력을 더해 그린 해도(海圖), 오랜 경험을 축적한 선원들,
그리고 이전부터 봐오던 하늘의 별밖에 없다.
그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지만 나는 내가 가진 판단의 근거를 가지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확인해야 할 것은 내가 설정한 목표가 내 자신과 남들을 설득할 만한지, 나를 덮치는 물음들을 회피하지 않고 있는지 정도다.
도착하여 그곳이 인도라고 굳게 착각하는 상황까지 생각하며 미리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가는 길에 절망하여 항해를 포기한 자, 하루하루 닥친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만 매진한 자,
미리 희망에 들떠 무책임하게 파도에 배를 맡긴 자들은 모두 중간에 사라져버릴 테니까.(p.19)
사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자신의 도구보다 더 못하는 일이 많다는 것은 그리 새삼스럽지 않다.
사람은 치타나 자동차처럼 빠르지도 않고 소나 불도저처럼 힘이 세지도 않다.
독수리나 망원경처럼 멀리 보지도 못하고 개나 전자 센서처럼 작은 소리를 잡아내지 못한다.
그런데 인간은 동물을 길들여 이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사용함으로써 동물과 기술의 주인이 되어왔다.
불도저의 강함과 망원경의 시력은 곧 인간의 강함과 시력이다.
그리하여 맥루언은 기술을 일컬어 인간 몸의 연장이라고 했다.
(p.383)
자연을 능가하는 기술은 없다. 사실 모든 기술은 자연의 이런저런 모습을 모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맞다면, 인간이 기술을 통해 만들어낸 모든 것들 중에서 자연의 이런저런 모습을 다 포괄하는
가장 완전한 자연을 능가하는 것도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기술에서 열등한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우월한 것을 위한 것인데,
이것은 자연 전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따라서 우리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아서 가치중립적인 것들을 소중히 여겨서 미덕들을 소홀히 하거나,
그런 것들에 쉽게 속아서 미덕들을 행하는 일에서 미끄러지거나 변질된다면, 정의는 보존되지 못하게 된다. (p.214)
인간을 가리키는 여러 말 중 호모 파베르는 흔히 '도구의 인간'이라고 번역된다.
그러나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만드는(혹은 창조하는) 사람인 인간(Man the Creator)'이라는 뜻이다.
이때 인간이 만드는 것을 도구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사실 이 표현의 처음 출처로 알려진 텍스트에서는 맥락이 약간 다르다.
고대 로마의 감찰관이었던 아피오 클라우디오 카에쿠스(Appio Claudio Caecus)가 그의 연설에서 인용한 문장은
"각 사람은 자기 운명의 창조자다(Faber est quisque fortunae)"이다.
위키피디아는 이 말이 르네상스 시절에 이르러 인간 주체성을 강조하는 인문주의자들에게
재발견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후 '호모 파베르'는 주로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으로 이해되면서 도구를 만드는 능력은 상대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나아가 그 만드는 능력이 생각에서 비롯된 것에 주목하여 호모 사피엔스로서의 인간이 강조되었다.
도구를 마늘고 사용하는 것 그 자체보다 그런 복잡한 과정을 정교하고 복잡하게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언어와 사고의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런 과점에서 도구의 제작과 사용은 인간의 언어, 지성, 이성의 결과 중 하나로 파악되고
독자적인 자리를 가지지 못했다.(p.222)
**노동**은 인간 신체의 생물학적 과정에 상응하는 활동이다. ...
노동이 이루어질 수 있는 근본 조건은 삶 자체이다.
**작업**은 인간 실존의 비자연적인 것에 상응하는 활동이다. ...
작업은 자연적 환경과 전적으로 구별되는 '인공적' 세계의 사물들을 제공해준다.
... 작업의 인간 조건은 세계성(worldliness), 다시 말해 대상성과 객관성에 대한 인간실존의 의존성이다.
행위는 사물이나 물질의 매개 없이 인간 사이에 직접적으로 수행되는 유일한 행동이다.
행위의 근본조건은 다원성으로서 인간 조건,
즉 보편적 인간이 아닌 복수의 인간들이 지구상에 살며 세계 거주한다는 사실에 상응한다.
(p.229)
작업의 특징은 목적과 수단의 구분인데, 작업을 통해 이룬 목적이 곧바로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취급되어
그 궁극적 목적 자체가 희미해지는 경우에도 작업과 노동의 구분이 사라진다.
특히 작업의 결과물이 노동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수단으로만 이해될 때에도 작업과 노동의 구분이 희미해진다.
예를 들어 기계는 힘든 노동을 대치하는데, 이 부분만을 강조하게 되면 장인이 사용하기 위해 만든 도구와는 다른 성격이 드러난다.
아렌트는 도구와 기계를 다음과 같이 비교한다.
"아무리 세련된 도구라 할지라도 그것은 손을 지도하거나 대신하지는 모하며, 손의 하인으로 남는다.
그러나 아무리 원시적인 기계라 하더라도 그것은 육체의 노동을 지도하며 결국 그것을 완전히 대체한다".
이렇듯 작업은 노동과 다르지만, 노동으로 **환원**될 소지가 많다.
그런데 현대기술의 발전은 그러한 경향을 더욱 부추긴다.
현대기술은 인간세계와 자연의 구분을 없애고 있다.(p.224)
노동은 반복적이고 순환적이지만, 작업은 **일회적**이고 **직선적**이다.
"명확한 시작과 예상할 수 있는 분명한 끝을 가진다는 것이 제작의 특징이다.
제작은 이 특징을 통해서만 다른 모든 인간 활동과 구별된다.
육체적 생명과정의 순환적 운동에 매여 있는 노동은 시작도 끝도 없다".
작업을 통해 인간은 자연의 순환을 거스르는 **독립적**인 물건을 만들어내고,
이 인공물은 **지속성**을 가진다.
이 지속성 때문에 인간은 '객관성(objectivity)'을 이해하게 된다.
이때 객관성이란 주변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고 지속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자연은 순환적이지만, 자연으로부터 만들어낸 인공물 덕분에 인간은 자연도 객관적인 어떤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작업의 결과물을 통해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 혹은 자기 동일성을 파악하게 된다.